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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 영광탑

상실된 민족의 뿌리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서는 역사의 뿌리부터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민족의 뿌리인 환웅의 역사를 신화로만 전하고 전체 역사를 없애버렸다는 부분이 안타깝습니다. 예를 들어 유태인들은 여호와 하느님한테서 창조된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하여 누가 누구를 낳고 그 뒤에 누구를 낳고 등등을 역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민족사도 아닌 씨족사라고 할 수 있는 족보도 외우는데, 부끄럽게도 오늘 우리는 제 민족의 역사보다 다른 나라 씨족의 족보를 외우는 사람이 더 많습니다. 다른 나라 족보를 외우는 사람들이 잘못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나라 역사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대사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음은 우리 민족의 뿌리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민족의 뿌리를 잊어버림으로써 결국 우리는 뿌리 없는 민족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모른다는 것은 자기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고대사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 이러하니, 민족의 동질성만 주장할 뿐 북한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었어도 마치 다른 민족의 일인 것처럼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6천 년의 한 뿌리 한 민족이, 50년 만에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생각으로 쉽게 바뀌어 버렸습니다. 우리 젊은이에게 가장 큰 문제는 이 민족의 뿌리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역사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

역사는 학교에서 배우기 이전에 가정에서부터 배워야 합니다. 유태인들은 나라를 잃고 2천 년을 지내도 아이가 태어나면 자기 나라 역사와 말부터 가르칩니다. 말을 잊어버려도 다시 배우면 되지만 역사를 잊어버리면 역사의식이 없어지기 때문에 역사가 없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해외 교포들은 말은 배워도 역사를 모르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이 우리 역사를 모르니 민족의 정체성이 차츰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자기 집 족보에 대해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민족과 종교와 인종을 초월한 세계주의자이기 때문에 족보나 민족사 따위는 몰라도 된다고 해서 버렸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뿌리 없는 부평초처럼 아예 모르는 것입니까? 자기를 잘 알아야 타인을 수용할 수가 있습니다. 자기 주체성이 있고 그다음에 다른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발전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의 문제를 잘 풀려고 한다면 반드시 역사 공부를 먼저 해야 합니다. 

근대사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한 민중들의 노력

현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6천 년 역사의 기본 토대 위에 근대사 100년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1800년대에 들어오면서 서구세력이 인도를 점령하고 인도차이나 반도를 차지하고 중국까지 쳐들어오는 서구동점의 시대를 맞습니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들은 이런 세계사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합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 중국이 변하지 않고 있으니 전 세계의 변화에 대해 캄캄절벽이었습니다. 오히려 권력투쟁에만 혈안이었습니다. 나라가 혼스럽고 여러 가지 어려울 때, 처음 불만이 터진 것이 옹경래의 서북민 봉기입니다(1811년). 이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민중 봉기는 아닙니다. 홍경래의 서북민 봉기는 차별받던 관서지방 사람들이 일으켰습니다. 고통받던 백성들은 거기에 동조하였지만, 실패로 끝났습니다. 지배층의 수탈과 자연재해, 외세의 침략이 겹치면서 기근사태가 일어납니다. 백성의 삶은 점점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굶어 죽는다고 해서 곧바로 민중봉기가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굶어 죽어가면서 분노한 민중은 먼저 부당하게 세금을 걷어 가는 아전을 갈아 치워야 한다고 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그러다가 아전 위의 수령이 더 나쁜 놈이라고 교체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수령이 몇 번 바뀌어도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고 그대로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몇십 년이 걸리면서 이렇게 백성들의 의식은 차츰 깨어났습니다. 1860년대 최제우 선생은 백 년 후를 내다보고 , 서구세력이 차차 동쪽으로 옮기면서 정복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음을 간파하고 , 거기에 대응하기 위해 동학을 세웠습니다. 동학은 인간의 고뇌를 구원하는 종교적 성향과 정치, 사회적 혼란을 개선하려는 정치개혁 성격도 갖고 있었습니다. 아전과 수령의 교체를 요구하던 민중의 불만이 동학 조직과 연계하면서 1894년에 동학혁명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글에 국내에서 혼란을 계속되는 와중에 외부에서 한반도를 어떻게 흡수했는지를 기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