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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백 영광탑에서

동학혁명 당시 시대적 배경과 원인

1800년대 후반 국내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는 등 내적 모순에 의한 혼란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외부에서도 한반도를 놓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동안 한반도에 대한 종주권은 청나라가 갖고 있었는데, 거기에 구애받지 않고 영국과 러시아, 프랑스, 미국과 일본이 넘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일본이 우리나라에 개항을 요구합니다(강화도 조약 1876년). 안으로는 지배자의 착취에 백성은 숨 돌릴 틈도 없는데 거기에 외세가 붙은 셈입니다. 당장 고통스러운 현실을 살아가기에 급급한 백성들이 외부세력을 인식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국내문제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엇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민중의 불만은 동학혁명으로 발전하여 결국 전주 감영을 점령하고, 전라도 전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놀란 정부가 황급히 화해를 제안합니다. 이때 동학의 지도부도 왕권을 교체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데까지 의식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왕은 괜찮은데 그 밑에 있는 관리들이 문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동학의 지도부가 정부의 화해 신청을 받아들였으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다시 2차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왕권 자체가 무너질 위기에 처하자, 왕권 세력은 그동안 갈등을 빚고 있던 외세를 끌어들여서 도리어 자기 백성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동학 농민들은 지배세력의 한계를 깨닫고 반봉건 투쟁과 반외세 투쟁을 동시에 전개했습니다.

동학혁명의 실패와 한반도의 주도권 전쟁

결국 동학혁명의 실패로 가담한 사람 중 30~40만 명(최고 50만 명) 정도가 정부군과 일본군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그 실패는 너무나 참혹했습니다. 동학 혁명의 기운은 죽어버리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나선 사람들도 일가가 폐문을 당하자 백성들은 패배주의에 젖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비정치적 신흥 종교 조직들이 생겨났습니다. 지배 권력이 붕괴 위기에 처하자, 국내의 지배자들은 외세를 끌어들이게 되고, 그 외세들은 한반도를 놓고 서로 각축전을 벌였습니다. 이때 청나라와 일본이 격돌하다가 일본이 승리하자(청일전쟁 1894년)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은 일본으로 기웁니다. 또 청나라와 일본이 격돌하는 틈을 타서 러시아가 급속도로 한반도에 세력을 뻗치면서 일본과 갈등을 겪다가 일본이 승리하자(러일전쟁 1904년) 한반도에 대한 주도권이 완전히 일본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대신 한반도의 일본 지배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가쓰라-테프트 조약, 1905년).

만주지방이 독립운동의 발산지가 된 이유와 임시정부의 원동력

1905년 을사 5 조약을 맺으면서 우리의 외교권이 일본에 의해 박탈당하자 다시 반일 기운이 곳곳에서 용솟음치면서 의병 활동이 시작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일본은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시켰습니다(1907년). 그러자 해산된 군인들과 의병이 결합하여 나라를 되찾기 위한 투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지는 못했습니다(그것은 지배세력 내의 유생, 즉 재야 지도자들의 봉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국내 활동은 경술국치가 이루어진 1910년 전후로 한반도 내에서는 점차 소명합니다. 이후 이들은 일본의 강력한 무력진압을 피해 만주, 연해주 등으로 옮겨가면서 고구려, 발해의 옛 영토 곳곳에 이미 이주해 와서 자리를 잡고 있던 조선족 마을로 들어와 은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만주지방은 이주민이 농경지를 개척하면서 형성한 조선족 마을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주로 단군을 국조로 받드는 대종교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국제적으로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 혁명적인 분위기로 고조되고 있었고, 자본주의권 내에서는 각축전을 벌이다 국제 전쟁으로 발전해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습니다(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고 영국과 미국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독일이 지배하던 발칸반도에 있는 소수민족의 처리에 고심하던 미국은 독일을 해체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채택했습니다(1918년). 그래서 독일의 지배 하에 있던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땅의 지식인들은 이런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야 이제 우리 민족도 독립되나 보다'라고 생각하여 독립의 분위기가 익어갔고, 종교 지도자들 중심으로 3.1 독립만세운동을 벌였습니다(1919년). 그 당시 종교조직으로는 천도교 세력이 가장 컸으므로 천도교를 앞세워 일어난 이 만세운동은, 지도하는 사람들의 기대를 훨씬 더 넘어서서 민중의 호응을 받으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이런 국내의 움직임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가들에게도 새로운 희망, 독립의 가능성에 대흔 믿음을 열어주어 중국에 임시정부를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